아가서

2019년 02월 24일

주제 :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7:10)

박경서 장로님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왕의 사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박균호 장로님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내용이 있는데, 성도가 이 땅에서 살다가 다시 천국에 가는 것을 표현한다. 잠언은 지정의 중에서 의지, 전도서는 지성, 아가서는 감성을 자극해 준다.

김영철 목사님

우리에게 앞으로 그런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지다. 우리는 한 주일에 한 권씩 아웃라인만 공부하고 넘어간다. 항상 소문맥은 중문맥, 중문맥은 대문맥의 맥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왜 지정의라고 하는 잠언, 전도서, 아가를 구분해 나갈 수 있는가하면, 각 권이 알려주는 내용이 있지만, 문맥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는 이렇게 아가를 공부하고 넘어간다. 매우 필요한 과정이다. 대문맥의 결론이 무엇인가 넘어가는 것이다.

유도순 목사님이 구속사라고 하고 괄호에 성경신학이라고 써놓았다. 성경신학은 성경을 보는 것이다. 장점은 성경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구속사는 성경만을 말하는 신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속사를 성경신학이라고 말했다.

아가서가 감성적 감정적이로 했다. 성경에서 정적인 문제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앎을 통해서 와야 한다. 사람이 흥분하고 감정이 고조되는 근원은 여러 경로가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지식이다.

성경에 난제가 있다. 난제를 만나거든 문맥의 지도하에 이것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면 된다. 술람미 여인의 말인지 솔로몬의 말인지 무분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어럴 때 억지로 근거 없이 풀려고 하면 안되다. 한 가지 방법은 성경신학적 방법, 즉 문맥적 방법으로 풀 수 있다. 중문맥과 대문맥을 보면 된다.

아가서를 한번 낭송하고 아가서를 다시 연구해야 한다.

구속사는 성경에서 성경으로 다른 말로, 성경 신학이다. 성경만을 가지고 다른 것의 도움을 받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에 도달하는 것이다.

2019년 02월 10일 주일 설교

시작의 끝

본문

(요 21:1) 그 뒤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그가 나타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요 21: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요 21: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요 21:4)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요 21:5)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요 2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요 21:7)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시작의 끝

“벌써 라는 말이 /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 벌써 2월” 오세영 시인은 2월을 ‘벌써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벌써’라는 말은 2월을 가리키는 별명으로 썩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정말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한 일 없이 1월이 훌쩍지나고 2월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2월에 ‘벌써’라는 별명을 외에 다른 별명을 하나 더 붙여주고 싶습니다. 제가 붙여주고 싶은 별명은 ‘시작의 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새해 인사를 두 번합니다. 1월1일하고 설날에요. 12월31일이 지나고 1월1일이 지나도 본격적으로 새해가 시작되지 못합니다. 설날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설 연휴에 고향에 가서 가족과 친지를 만납니다. 직장과 단절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시작을 할 준비를 갖춥니다. 기업인들도 설 연휴에 보너스를 조금이라고 주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설 보너스를 주고나야 한숨 돌리고, 연휴가 끝나 뒤에 직원들을 몰아칠 수 있습니다. 설은 주로 2월에 찾아옵니다. 그래서 2월이 우리나라에서는 ‘시작의 끝’에 해당하는 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시작의 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한때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다니고 믿음이 있는 것도 같은데,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것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신앙인으로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지 못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시작의 끝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2월이 되었으니 시작의 끝에 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시작의 끝’은 언제인가? 다른 말로 신앙생활의 본격적인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다음 세 가지가 시작의 끝을 알려주는 알람입니다.

시작의 끝 1. 자신을 보는 것

첫째, 신앙생활은 자신을 보게 될 때 시작합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놀라운 내용입니다. 무엇보다도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을 벗어난 전개가 일어나기 때문에 놀랍습니다. 베드로가 간이 부어도 유분수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제자 노릇’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흩어진 제자를 불러모으고, 조직을 재건하려고 하려고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바쁜 상황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매우 무례하고 반항적인 태도일 수 있습니다. ‘찬물을 끼얹는다’는 표현에 들어맞는 행동입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베드로의 행동은 예수님의 사역에 찬물을 끼얹는 무례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를 보면 베드로가 고향으로 내려간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에 반발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전에는 자신이 믿음이 좋은 줄 알았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오른팔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이상 전처럼 자신만만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변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런 일은 자신을 보게 되었을 때 일어납니다. 자신을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만큼 큰 변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지성은 자기객관화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공부하는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너무나 많은 학문, 교양, 철학이 있습니다. 그걸 언제 다 공부해 머리 아파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십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은 사실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이념의 대립이 심각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바꾸어주기 힘듭니다. 그런데 역사를 알면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가 로마시대 공화정파와 황제정파의 갈등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영웅이었고 부루투스는 카이사르를 매우 존경하고 좋아했던 사람인데, 부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했습니다.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카이사르를 비롯한 황제정파는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고 전쟁과 반란이 끊이지 않게 되자 전권을 가진 황제가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공화정파는 로마시민은 모두 평등한데 황제가 생기면 로마시민 사이에 계급이 생기고 차별이 심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조금 불편해도 공화정을 유지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두 주장 다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겠습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서 청나라 군사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주전파는 죽더라도 싸우다가 죽자면서 결사 항전을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화친파는 잠시 굴욕을 참고 항복하자고 했습니다. 또, 조선시대 말기에 외국의 개방요구가 거셌을 때,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척사파는 절대 개방하지 말자고 했고, 김옥균을 비롯하 개화파는 적극적으로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습니다. 지금은 좌파와 우파로 나우어져 있지만, 역사적으로 항상 인간의 조직은 나누어졌습니다. 공화파와 황제파, 주전파와 화친파, 척사파와 개화파로 말입니다.

두 주장 다 일리가 있었습니다. 또 공통적으로 둘로 나누어져서 대립한 파벌은 실제 적보다도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더 미워했습니다. 그 미움이 얼마나 심했냐면 부루투스가 카이사르에게 했던 것처럼 죽이고 싶을만큼 미웠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알게 되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내가 사는 이 시대를 보게 되고, 내 행동을 보게 되고, 내 생각을 보게 됩니다. 이런 자기객관화가 세상 공부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세상 학문의 역할은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술객들이 모세를 따라하다가 세 번째 이재앙부터 따라하지 못한 것과 비슷합니다. 생각을 조금 바꾸어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을 주지 못합니다. 그 이상이 무엇이냐면 ‘죄의 각성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깊은 각성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정말 지옥가야할만큼 죄인인가?’라는 질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 정도면 의리있고, 법도 잘 지키고, 인정있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면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알면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2:1에서는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시작의 끝 2: 찾아오는 것

둘째, 시작의 끝은 은혜가 찾아올 때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행동을 보면서 익숙한 느낌을 받습니다. 거역과 반항의 기질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기와 질투, 편견과 독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만큼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결코 이르지 못합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것이고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믿을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우리는 본격적으로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인본주의적인 신앙관을 좋아하고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믿음이 좋아야 구원 받고, 내가 열심히 기도해야 응답을 받는다는 원리입니다. 이런 인간중심의 원리는 합리적이고 공평한 것 같지만, 매우 불공평하고 불합리합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신앙을 가져도 아무 불이익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 중에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 고난, 고문, 살해 위협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박해가 없는 나라에서 보험들듯이 교회 다닌 사람과 박해가 심한 나라에서 신앙생활하다가 고문에 못이겨 신앙을 부인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누가 더 믿음이 좋을까요?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까지입니다. 그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히브리서 12:2에서는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할 일은 없습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을 저는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발견했습니다.

후크마 교수는 좁은 의미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전후의 넓은 의미의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진리를 찾고 신앙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신비롭게 역사합니다. 특히 구원의 순간에는 인간의 의지나 공로가 전혀 포함되지 않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이 역사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하나님의 섭리에 열린 마음으로 따르는 일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단계적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계적으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한계단한계단 올라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됩니다. 아내와 저는 소위 영성사역하는 단체에 십년여를 있었습니다. 그 단체가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헛된 자부심, 교만이 있었습니다. 종종 뭔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떠나지 못했습니다. 강권적으로 평택으로 오게 되면서 새롭게 구속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지금도 환난을 당하면서도 번영주의, 물질주의 신앙에 헛된 충성을 바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요즘같이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야 합니다. 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 진리를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작의 끝 3: 승복하는 것

셋째, 승복할 때 시작합니다. 승복한다는 말은 ‘납득하여 따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생각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납득했기 때문에 따른다는 말입니다. 전도할 때 하나님한테 줄 서라는 식으로 전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가장 힘 센 신이니까 하나님 믿어라, 하나님 안 믿으면 지옥가니까 하나님 믿어라는 식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승복한 사람이 아닙니다.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교회를 타락시킵니다. “니네를 교회 안 나오면 다 지옥 가” 이런 식으로 협박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실까요? 아니 그런 식으로 믿음이 전달될 수 있을까요? 그런 말에 겁나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더 무섭습니다.

베드로가 ‘제자 파업’하고 고향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이 체면이 깎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이런 전개를 보면서 감동에 젖습니다. 이런 전개는 꾸며낼 수도 없습니다. 사고의 한계를 벗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입니다. 직장에서 본 그 어떤 리더도 예수님 같은 분은 없었습니다. 직원이 이렇게 행동하면, 파면하거나 좌천 시킵니다. 학생이 이렇게 행동하면 낙제점을 줍니다. 자녀가 이렇게 행동하면 부모라도 괴로울 것입니다. 전적으로 삐딱한 마음으로 반항적인 행동을 한 베드로가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서 그를 용서하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대속 못지 않은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섭섭하게 하거나 내 기대를 깨뜨린 사람, 나의 좋은 기회를 망치고 결정적인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살점을 뜯는 처럼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제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말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을 바라보며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사회에서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보면 해고하거나 벌 줄 생각부터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유능하게 할 생각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능력있는 분이시고, 섬김의 인격을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가치 있는 삶입니다. 실패해도 의미가 있습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걸으면 도중에 멈추더라도 전진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법칙을 따르는 삶은 성공해도 가치 없는 삶입니다. 그릇된 방향으로 걸으면 아무리 멀리가도 무가치합니다. 승복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어보여도 가치있는 삶을 살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최고 힘에 세니까 하나님한테 줄러라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주신는 감동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고, 인본주의 종교관을 기독교라는 단어로 포장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무늬만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는 강하다

룻기에서 역사의 숨은 영웅이신 예수님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숨은 영웅,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 성찰, 자기 객관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체에 빠지기 쉽습니다. 양심이 악한 사람은 나쁜 짓을 해도 담대한 반면, 양심이 예민한 사람은 작은 죄에도 절망하기 쉽습니다. 양심이 주는 경고를 무시하면 안되겠지만, 압도적인 의로 우리를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세계보다 양보다 질이 중요한 영역은 없습니다.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시작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2월에 우리 신앙을 돌아봅시다. 내 자신을 보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인도에 열려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승복했는가?

2019년 01월 13일 주일 설교

영웅 시대의 숨은 영웅

본문

(룻 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룻 1: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룻 1: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룻 1: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룻 1: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우울한 시작

새해가 되었습니다. 연말에도 연말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분이 많았는데, 연초에도 연초 분위기가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눈이 오지 않은 영향도 있는 것 같고, 사회가 워낙 바쁘게 돌아가다보니 연말 혹은 연초라고 해서 긴장을 풀거나 여유를 즐길 시간을 갖지 못해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새해가 새해같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경기침체가 원인인 것 같습니다. 경제가 어려우면 마음이 위축되고 살아가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오늘날과 비슷한 시대가 성경에도 여러번 나옵니다. 룻기의 시대가 오늘날과 비슷한 그런 시대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룻기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교훈을 얻었으면 합니다.

룻기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현실을 객관화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바다의 물고기들이 고함을 쳤답니다. “도대체 바다가 어디있냐?”고 말입니다. 바다 속에 살고 있다 보니까 바다가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된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것은 오히려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만해도 자기 얼굴을 가장 모르는 사람이 자기자신이었습니다. 깨끗한 거울이 보급되기 전에는 자기 얼굴을 볼수가 없었으니까요. 어쩌다가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면 ‘이게 내 목소리 맞아?’하고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목소리는 공기를 통해서 전달되는데, 자기 목소리에는 자기 몸을 통해서 울리는 소리가 대해진다고 합니다. 공기를 통해서 전달된 목소리만 듣게 되는 다른 사람이 듣는 소리와 조금 달라지는 것이지요. 결국 자기가 듣는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 듣는 목소리와 다르다는 말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잘 모르게 될 때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자기는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보고 이해하는 것과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자기 목소리나 얼굴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비슷한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시대에 너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멋 훗날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룻기의 시작부분을 다시 한번 살펴보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객관화하고 재발견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웅 시대의 현실

룻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사사시대는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면 영웅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는 말은 “영웅이 많이 있던 시대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고, 일부만 그렇게 불렀지만 말입니다. 현대그룹을 창업한 정주영 회장이나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 회장 같은 사람을 경제계 영웅이라고 하는 사람이 일부 있습니다. 정치계는 더 논란이 있지만 일부에서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독교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 구절입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영웅이라고 추앙받는 사람이 많으면 매우 행복하고 살기좋을 것 같은데 현실은 반대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이 있습니다. 전쟁 기간 즉 난세에 활동했습니다. 영웅이 나온다는 말은 사실은 혼란스럽고 살기 어려운 시대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 시대니까 영웅이 필요하고 영웅이 될 수 있는 시대니까요. 영웅이 많은 시대가 살기좋은 시대는 아닙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되니까 존경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사들은 이스라엘이 매우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께 매우 큰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그 시대 사람들이 잘먹고 잘살고 신앙도 좋았을 것 같은데 아니었습니다.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자 믿음에 따라서 살아간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살아갔습니다.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구절이 무엇입니까?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구절에서 왕은 단순히 왕정제도를 통해서 왕으로 뽑힌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살아갔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 같은 사람을 추종하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 같은 주장을 따라간 것입니다.

엘리멜렉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압지방으로 가족이민을 갔습니다. 그 가족 구성원의 생각으로는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나쁜 선택이라고 생각했으면 가족이민을 갔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에 신앙적 경제적 측면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습니다.

요즘 이단이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봅니다. 전에는 위축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대놓고 포교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요? 시대적으로 보면, 지난 시대 기독교에 원인이 있습니다. 지난 시대에 기독교가 행한 일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능력이 있는 목회자가 기독교 지도자가 많다고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사시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 시대의 구원자라고 생각한 사람이나 그들을 추종한 사람들이 조금도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이유는 이 부분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본받아라”가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르 본받는 나를 본받으라”고 해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인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교회의 행사에 갔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을 우상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인도 교인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신이 이룬 성공 혹은 교회성장을 보면서 나는 이 정도 존경은 받을만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런 우상화와 대형화를 통한 마케팅 효과로 성장했기 때문에 자연스런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같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면 저럴 수 없을 텐데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이라는 책에서 왜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지 세가지 이유를 적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이다. 저는 이 세가지 이유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좋은 말이어서 고개를 끄덕인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울리고 생각에 스며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위대해 보이고 능력 있어 보이고 대단해 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시대입니다. 사사시대 엘리멕렉 가족이 그러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들의 선택은 바른 선택이었을까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선택의 결과

이스라엘 사람은 모세 시대 하나님과 언약을 통해 얻은 땅, 이스라엘을 떠나면 안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떠나면 안됩니다. 엘리멕렉 가족이 그 사실을 몰라서 그랬는지 혹은 알면서도 자기합리화를 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은 약속의 땅을 떠났습니다.

항상 역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시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썩으면 줄기도 죽습니다. 잘못된 역사 위에서면 나의 의도와 상관 없이 잘못된 삶을 살게 됩니다.

구속사에 사 즉,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최선의 선택은 최악의 선택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섣부르게 그들이 겪은 비극이 하나님의 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유는 욥기에 잘 나와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즉각적인 응보를 하기 보다는 많은 경우에 심판을 유보하시기 때문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가 되면, 자기 생각에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최악의 선택이 될 수도 있는 선택을 말입니다. 외삼촌에게 바둑을 배울 때 최선을 다해서 한수한수 두었는데 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최선을 대했는데 지고 나니까 최선을 다해서 둔 한수한수가 패배로 가는 수만 둔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해서 두지 않는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냐면 더 크게 진다는데 있었습니다. 이런 걸 한계라고 해야겠죠.

자기 최선을 대했다고 해서 바른 선택을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행히도 하나님은 성경을 주셨고, 진리를 명백하게 알려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명백한 진리를 거절한다는데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옳은 주장인지 누가 바른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데카르트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데카르트가 무엇이 확실한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여기 보이는 물건들이 확실해 보이지만 그것이 나의 착각일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고민 끝에 발견한 것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였습니다.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건 언제나 확실한 사실입니다.

저는 기독교에서 가장 확실한 게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 어떤 사람은 전도, 어떤 사람은 성령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확실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 아닙니까? 다 아는 얘기 같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들은 배리칩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사실 제는 한참동안 왜 그게 문제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의 666 표식을 베리칩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베리칩을 몸에 심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구원의 근거가 예수님이 아니라 베리칩에 있다는 말입니다. 양보해도 예수님 플러스 베리칩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건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베리칩교입니다. 자신이 베리칩교를 믿고 있는데 베리칩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율법주의가 베리칩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다른 어떤 것이 예수 그리스도 대신 구원의 근거가 되거나 예수 그리스도 플러스 어떤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잘못된 선택으로 돈을 잃고 건강을 잃는 것도 비극이지만, 가장 큰 비극은 영혼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영웅 시대의 결말

영웅들의 시대가 어떻게 마무리 될까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끝판왕 영웅이 나와서 적들을 모두 물리치면서 끝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거입니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사시대의 마지막에 삼손이 나오니까요. 삼손은 다른 사사와 다릅니다. 탄생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특별한 인물에게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무후무한 힘을 가졌습니다. 사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사사였습니다. 이 사사가 사사시대를 마무리했을까요?

사람이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그렇게 지었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삼손은 사사시대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자아실현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자기 성공을 위해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그런 재능을 받은 줄 알고 말입니다.

룻기는 사사기의 결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 즉, 영웅시대의 결말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최고의 영웅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믿음의 사람이 마무리 지었습니다. 바로 룻입니다. 하나님께서 룻을 선택하신 이유는 룻이 전혀 영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녀가 영웅적인 일을 할 거이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좀더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 혹은 엄청난 은사를 받은 목회자가 나타나면 교회가 부흥하고 기독교가 흥왕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 기대가 계속될 때 오히려 진정한 부흥과 기독교의 흥왕은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영웅적인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데, 우리는 반대로 영웅적인 사람을 기대하고 추종하고 있으니 엇박자가 납니다. “다윗같은 사람도 있지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다윗이라는 사람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도구였습니다.

그런 해석의 근거가 사실 룻기에서 비롯합니다. 룻기는 오늘 읽은 5절에서 완전한 절망을 줍니다. 드라마로 비유하자면 주인공이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시작하자마자 5분 안에 다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시청자가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갈까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영웅시대의 완전한 종말입니다. 영웅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위대한 신앙인이 나타나서 이 세대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세속 역사에서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으로 벌어졌던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있었습니다. 기사들이 중심이 된 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을 끝낸 사람이 다름아닌 잔다르크입니다. 잔다르크가 관련된 세부적인 것은 해석이 필요하지만, 대략적인 면에서 보자면 기사가 아닌 여인이 기사들의 전쟁을 끝내다는 의외의 결말을 알려줍니다.

절망이 주는 소망

영웅 시대는 숨은 영웅인 그리스도에 의해서 마무리됩니다. 룻기가 그 사실을 증언해 줍니다.

우울하게 시작된 새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렇기 때문에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에 숨은 영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