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9년 01월 27일

박균호 장로님 진행

주제: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

양남림 사모님

전에는 시편을 감성적으로 생각했다. 시편을 보고 기도하라는 말씀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박균호 장로님

성경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개별 성경의 줄거리를 알지 못한 상택에서 하나님에 관해서 얘기하고 찬양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설명을 듣지 못했었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분량에 상관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설명될 때 우리 머리 속에 들어오게 된다.

전에는 양이 많으면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핵심을 알고 150편을 보면 잘 들어올 것이다. 구속사적으로 보니까 내용이 하나이다.

우리가 다음에 잠언과 전도서를 보겠지만, 모두 구속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예수 그리스도가 예표되어 있고, 표현되어 있다. 언약의 당사자들인 아브라함과 다윗. 다윗이 시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책이다.

김영철 목사님 총평

오늘 성경 공부를 하는 동안에 시편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러분이 저에게 시위를 하는 것처럼 느꼈다.

시편을 등한히 한 것을 항의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것이 끝나면 로마서와 계시록을 모두 하고 싶다. 시간이 주어질지 모르겠다. 시간이 된다면 시편도 하고 싶다.

지난주에 성경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맀다. 그리스도 사역에 관한 예언, 준비, 반영, 결과이다. 가장 광범위하게 구속사의 전체 카테고리를 모두 가지고 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사람을 중간에 둔 하나님 나라와 사탄 나라의 전쟁까지 다룬다.

다윗뿐만 아니라 아삽과 다른 사람도 시편을 지었지만, 성령님이 주도하셨다. 시편 안에는 중문맥이 모두 들어있다.

시편에는 감성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어떤 분이 성경에는 지정의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한쪽에 치우치면 안된다고 말했다. 감성적인 부분을 무한대로 규제 없이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성경에서 모든 감성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에 한정되어서 느끼는 감성적인 요소만 지지한다.

분명히 성경에는 지성적인 요소도 있지만, 고전 13장 같은 장도 존재한다.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보지 못하고 그 장 하나만 보고 감성적이라고 표현하면 안된다. 그 문맥을 보려면 13장 한 장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11~14장까지가 소문맥으로 존재한다.

13장에서 사랑을 얘기할 때문 무엇을 얘기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느냐가 중요하다. 그 배영을 살펴야 한다. 배경은 11장에서부터 나온다. 11에서 방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고린도교횐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나온 이야기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린도교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성경과 반대로 사용했다. 그건얼 교정하게 위해서 쓰여졌다. 고린도후서는 신학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성과 속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교회가 고린도교회이다. 하나님의 은사가 최고로 잘 반영되어 있을 때 이런 모습이 나온다.

방언은 없어지는데 한가지만은 끝까지 간다. 그것은 사랑이다. 시야가 좁은 사람들이 감성의 발현에 관해서 말한다. 문맥의 규정에 따라서 성경을 보아야 한다.

시편에서도 시가 형식을 띠고 있지만, 성령과 악령의 대결이 나온다. 선인과 악인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모형이 다윗이다. 그가 억울한 일을 당한다. 다윗이 겪었던 모든 상황들이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 연결시켜준다.

예수님의 일대기가 시편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일대기, 하나님 나라의 시작부터 완성 까지를 보여준다.

언약의 당사자, 아브라함과 다윗. 아브라함을 들어서 선지자라고는 해도 모형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윗은 모형이다. 예수님도 시편을 자기에 관한 글이라고 하셨다.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일대기를 탄생, 고난, 죽음, 부활, 승천까지 단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시편도 감성적으로 다루면 안된다.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쓴 글이다. 다윗이 죄를 짓고 토설하는 것도 있다.

욥기

번제로 시작하여 번제로 끝나는 욥기

박대규 집사님 인도

원복음을 주시고 복음의 실체되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다.

욥의 친구들과 욥이 논쟁하고 있다. 율법에 관련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중보자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욥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 했다. 우리 자체로 죄가 사라지지는 않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사라지게 된다.

에덴동산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 욥이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회복해 주신다. 욥도 자기 생일을 저주했다.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저주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른 불평도 많이 한다.

사탄을 이긴 것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그분만이 승리자이시다. 우리의 시선을 욥이나 자신에게 돌리기를 원치 않으신다. 온인류를 대신해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기를 원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이름에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우리 힘으로 절대 안된다.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중요하다. 포도나무 비유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것들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겸손이다.

욥의 친구들이 주장한 것

예를 들어, 욥기 8:1~7. 빌닷은 욥의 자식이 죽은 이유는 욥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청결하고 정직하라고 말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없다.

실로암 못의 비유. 실로암 못이 기혼샘의 물을 받아서 깨끗해 진다. 외부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깨끗해진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빌닷의 말은 인본주의적인 말이다.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말이다.

이들은 오늘날 주장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진실하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라는 인본주의 주장을 한다. 욥도 결국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욥기는 결국, 번제를 통해서 세 친구의 죄가 용서되는 것으로 끝난다.

김영철 목사님 총평

박대규 집사님의 오늘같은 설명을 신학교에서 해 주었으면 좋겠다. 구속사에 관해서 정리가 잘 되어있다. 욥처럼 나의 구속자가 보신다는 사실에 위로 받으시기 바란다.

일단은 박대규 집사님 다 좋았는데, 조금 오해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욥이 예수님의 분신처럼 메시아를 대신하는 모형처럼 보여지는 것처럼 얘기했는데, 그렇지 않다.

욥기는 성경 후반부에 배치되어 있다. 창세기와 같은 시대이다. 창세기는 구속사의 청사진을 설명해 놓는 책이다. 욥기도 마찬가지로 보아야 한다.

욥기도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세상이 함께 진행된다. 사탄과의 전쟁이 이어지는데, 전쟁터는 어디냐 결국 사람이다. 사람을 놓고 싸운다는 관점에서 욥기를 보아야 한다.

악인들이 더 많다. 그러나 여인의 후손이 승리한다는 구도로 간다. 창세기의 구도와 동일하다. 사탄이 제시하고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사건이 사람 안에서 벌어진다.

욥이 허용된 범위 안에서 고난이 이어진다. 램넌트의 계보가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로 생각해야 한다.

욥의 요구는 대속자이다. 우리는 사탄이라고 하면, 무조건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두고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사탄이다.

2막에 들어가면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길게 이어진다. 그것이 영적인 전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욥의 친구들이 한 말이 다 맞는 말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선한 사람에게 벌을 내릴 수 있는가? 악인은 축복하실 수 있는냐?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 힘들다. 이런 문제때문에 욥이 괴롭다.

욥을 정말로 힘들게 하는 것은 ‘신정론’이다. 니가 하나님이 올바르고 정직하고 공평하고 의롭다고 믿는다면 그런 하나님이 너에게 무자비한 고난을 줄 수 있느냐? 니가 뭔가 숨기는 죄가 있다고 친구들이 힐난한다.

요즘의 강단도 똑같다. 하나님 말씀을 인용해서 근거 없이 적용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모두 옳다고 주장하는 친구들에게 반박할 수 없다.

욥은 내 육체가 썩어져도 만날 분이 있다. 나를 판단할 분이 있다. 이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원수가 밖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교회 안에 있다. 교회가 욥의 친구 입장이 되어서 더 옭아맨다.

욥에게 니가 이실직고하라고 요구한다. 그 내용은 율법주의 관점에서 본 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해결은 번제이다. 번제를 얘기한 이유는 욥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고 얘기한 것이다. 구속사의 핵심은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리스도이다. 너희들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팔복도 너희들이 걱정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천국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분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열매가 열린다. 열매는 바로 ‘의’이다.

마지막에 가서 세 친구를 용서하실 때에도 욥이 그들을 대신해서 번제를 드려준다. 왜 욥이 번제드리는가? 그가 예수님을 상징하지도 않는데.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에스더

2019년 01월 13일

주제: 설픔이 변하여 기븜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9:22)

부림절.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당하기 전에 반전이 일어나서 하만과 대적을 죽인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키는 명절.

에스더에는 하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손은 있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더 넓게 더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 하만은 사탄의 대리자,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사탄의 괴계는 계속되고 있지만, 결코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알려주고 있다.

박균호 장로님

에스더가 짧지만, 지금 표현으로 말하면 연출가가 연출한 것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우연이라고 표현했는데, 내시들의 반란을 고발한 공적이 보류되어 있고 에스더가 왕비로 뽑힌 일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만이 아각 자손으로 등장하고,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활동한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연출이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여자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저지하려는 사탄의 대결 구도이다.

박경서 장로님

에스더가 나를 위하여 금식하라고 부탁한 것이 인본주의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성경을 백팔십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아야 한다.

유대인의 대적이라는 말이 여러번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만을 비롯한 사람의 궤계는 사탄의 궤계라고 볼 수 있다.

박균호 장로님

인본주의적 해석에서는 인물이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하만민족과 유다민족에 싸우다가 유다민족이 구한 내용이다. 우리가 에스더나 모르드개처럼 살신성인하면서 살아야 믿음이 아니냐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이 출중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셨다가 때맞추어 필요한 일을 진행하셨다. 하나님의 각본대로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연출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박경서 장로님

이면을 보지 못하고 표면만 보면 잘못 해석할 수 있다. 모르드개가 출세한 것만 보게 된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행동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게 된다. 그는 조연이고, 도구이다.

김영철 목사님 총평

짧으니까 짧게 끝난 것 같다. 그러나 짧아서 더 어려울 수 있다. 두 장로님의 해석이 정확했기 때문에 덧붙일 말이 없다.

성경은 네 가지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준비, 예언, 결과, 영향.

이 사건의 배경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다. 또 귀환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스라엘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사건이다. 다니엘도 비슷한 상황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가셨다. 구약의 테두리는 이스라엘 땅인데, 이것은 그 밖에서 일어난 일이다. 원줄기는 비슷하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가장 먼저 겪은 전쟁이 아말렉 전쟁이다. 가장 치열한 전쟁이기도 하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태양이 머물기도 했다. 사울 시대에도 이 문제가 연결된다. 사울이 불순종하여 죽이지 않았다.

이 구도가 이스라엘 밖에서도 일어난다.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과 사탄의 나라가 전쟁하는 구도이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있었던 것이다. 승리는 유다민족에게 돌아갔다.

미래에 관한 예고의 성경도 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악인이 번성하고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악인이 번성하여 쫓기고 유리한다. 그러나 최후 승리는 반전하게 된다.과거 역사에서 끝나지 않고 미래도 들어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가장 속이 시원한 표현은, 연출하신 분이라는 표현이다. 어느 성경을 보더라도 사람의 행위, 믿음을 보고 평가하면 그것은 점으로 보는 것이 된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표현으로 믿음을 앙양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페르시아가 점령한 지역이 얼마나 넓은지 잘 설명해 주셨다. 인도부터 불가리아까지 아하수에로가 지배했다. 이 사건의 핵심을 추려놓고 보면 모르드개와 하만이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부분에서 영적인 부분으로 시각을 돌리게 된다.

가장 오해되고 잘못 이해되는 성경이 에스더이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계신다. 꿈을 주관하시고 필요한 때에 개입하신다. 그렇게 성경을 바라볼 때 성경을 바라보는 눈이 열린다.

룻기를 통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무를자’이다. 에스더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알려준다.

느헤미야

2019년 01월 06일

박균호 장로님 진행

성전을 세우고 복원하는 것 모두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관한 가르침이다.

전적타락, 전적부패에 관한 가르침이 성정의 파괴와 재건을 통해서 교훈되고 있다.

공부 중 의문점

  1. 중문맥을 고려할 때, 느헤미야서를 에스라와 관련해서 생각하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2.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벽 복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성벽은 성전을 보하하는 의미가 있다.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3. 언약갱신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갱신의 의미가 새로운 미래에 관한 언약이냐 아니면 흐려진 언약에 관한 재확인이냐?

언약을 갱신했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다시 ‘갱’자이다. 다시 했다. 언약의 주체는 한 분이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을 때도 아브라함이 지나가지 않았다.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간의 언약이다. 언약이 깨어졌다는 말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간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성전을 파괴한 것은 적군이 한 것이지만, 실상은 그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나로 성전 파괴를 못하도록 할 사람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고 하셨다. 하나님 스스로 성전을 파괴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배반은 결국 언약 파기이다.

구약의 모든 사건에 해피엔딩이 없다. 하나님 입장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리스도 외에는 소망이 없다. 그리스도 외에는 언약이 지켜질 수 없다.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의지하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성벽을 재건했다는 말. 성벽을 재건하는 것을 막은 사람은 적이 아니라 혼혈인들이다. 언약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적은 밖에 있는 불신자가 아니라 교회 안의 대적자들이다. 구속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복음의 역사를 방해한다. 하프-유대인들이 문제를 일어킨다.

구약의 결론은 그리스도가 언약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약의 핵심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인은 언약의 종속자이다.

에스라

박대규 집사님 진행.
포로귀환 후 이스라엘 사람들
에스라 7장 9절 ‘여호와의 손’이 등장

이방 여인들과 결혼에 관한 개혁

왜 하나님께서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셨는가? 성전은 죄사함이 중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를 드려서 피를 뿌리심. 양의 피가 뿌려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받아들이심. 실물 교육이 필요한 시대였기 때문에 성전이 필요.
성전이 예수님을 의미하기 때문에 성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된다.
우상숭배는 메시아 언약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라가 머리를 뜯을 정도로 이방인들과 구별을 강조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구원계시의 도구이다. 삶으로 성경을 전달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졌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것이다. 이방신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하나님 거룩한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포로에서 귀환시키셨다.

성전 터에 관한 문제. 다른 곳에서 제사를 지내지 말고,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서 번제르 드려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 다윗이 희생제사를 지낸 아리우나 타작마당이 성전 터이다. 그곳에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남은자는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던 사람이 아니라 언약 안에 있었던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들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 안에 있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구속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역사를 진행하셨다.

성전 재건을 스룹바벨이 주도했다. 스룹바벨이 예수님의 조상. 씨를 보존하신 하나님의 섭리.

박형서 장로님.
4장에서 스룹바벨 성전을 건설할 때 대적자들이 나타났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사마리아 사람들의 협조를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순수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그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순수성이 문제가 있었다. 현대 교회에서도 복음주의에서 벗어난 번영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일이다.

박대규 집사님.
사마리아 사람들은 순수성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 나를 위해 믿는냐, 하나님을 위해 믿느냐? 하나님을 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성전 건축에 동참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양남림 사모님
구속사를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가 잘 안된다. 수염, 머리털 유대인의 특징?

김영철 목사님
좋은 해설을 많이 해 주셨다. 사실 설명하고 싶은 것을 다들 잘 설명해 주셨다. 제2의 출애굽이라는 바벨로으로부터의 귀환. 애굽에서 탈출하여 정황의 의식을 갖고 하나ᅟ니님 나라의 시민법을 받았다. 그후 하나님 백성으로서 진전했다.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백성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성전을 재건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좌소는 성전이다. 성전을 보수한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수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수하는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 보수 교단이 연합 운동에 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에스겔은 멸망의 삼단계를 말한다. 성전에서 죽은자 1/3, 길가에서 죽은자 1/3, 사로잡혀간 자 1/3. 이렇게 멸망을 당한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성전과 아울러서 성을 보수한다.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다시 그렸다. 1/3이 사로잡힌 자들이다. 그곳에 남겨져 있던 자들. 앗수르의 혼혈 정책으로 혼혈족에 되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 장소에 관해서 질문한다. 예수님은 유대인이고 여인은 사마리아인이었기 때문에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너희는 모르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유대인이 안다는 것은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을 안다는 의미. 제사드리는 장소는 오직 한곳.구원은 한 분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들이 예배 장소를 따로 만들었다는 말은 사이비 종교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모르는 것을 예배한다는 말이다.

가인과 아벨 시대에도 남은자가 있다. 남은자 셋에 의해서 복음이 진행된다. 남은자가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셈의 자손에서 아브라함이 나온다. 에스라가 돌아왔을 때 스룹바벨은 성전을 건축했고 에스라는 말씀을 준비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나누어 준비했다. 혼혈족들이 동참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잘못 생각하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같은 구절을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 적용한 구절이다. 비슷한 예가 성시화 운동이다. 지역 교단이 초교파로 모여서 연합 집회를 한 적이 있다. 번영주의를 선전하는 일로 전락했다.

현재는 혼혈인을 차별하차는 말이 아니다. 교회를 재건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별이다. 성별해야 한다. 성별을 주도한 사람이 에스라이다. 오늘날의 성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WCC 혹은 연합운동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