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요약

역대하 주제 : 인간의 거짓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역대하는 열왕기상하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왕위에 올라 성전을 건축하는 것과 분열왕국이 되었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는 내용입ㄴ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이 다릅니다.
열왕기상하에서는 북왕국과 남왕국 즉 분열왕국의 역사를 교차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반면, 역대하에서는 북왕국의 역사를 생략한채 언급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이는 역대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점이 되는데, 선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라는 관점으로 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다윗 언약을 배반하고 떨어져나가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북왕국에 대해서는 침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대기가 선약의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바가 무엇인가?
첫째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불에타고 백성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자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불가능성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는, 유일하신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한다는 것과 셋째는, 메시아 언약 즉, 복음진리를 보수해야한다는 점입니다.
결론은,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케”(고전 10:11)하셨다는 것입니다. 본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며,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토론

박경서 장로님 요약

다윗의 길이냐? 여로보암의 길이냐? 율법의 행위로 구원에 이를 사람이 없다.

중심 주제 성전.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만나는 장소. 중보의 역할을 하는 장소.
솔로몬 기도의 핵심은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성전의 모든 식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 중보. 하나님도 한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2~24장. 인간의 패역함을 보여준다.
요아스는 하나님의 전에서 보호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우상을 숭배하고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성전 뜰에서 죽임. 죄-심판-하나님의 은혜

아담의 반역, 바벨탑에서 반역,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패턴이 열왕기하에서도 나타난다.

죄가 총공세를 펼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가 넘치도록 하셔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오셨다.

박대규 집사님

바사왕 고레스를 통해서 해방시켜주겠다는 말씀. 복음이란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출애굽을 통해서 사탄에서부터 구원을 설명하신 것처럼, 죄 문제를 성전으로 눈에 보에도록 설명해 주셨고,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것을 설명해 주셨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그들 수준에 맞게 복음을 잘 설명해 주셨다.

박경서 장로님

예수님은 성경이 내게 대해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관해서 증거하는 것인데, 그것을 발견해 낼 수 있는가?

성전.

김영철 목사님

성전에 관해서는 구약은 예표 교육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니의 나라이다. 선정통치이다. 하나님이 친히 출애굽하실 때부터 함께 하겠다고 하셨다. 그 건물에 계셨었다. 나중에 솔로몬이 낙성식 기도할 때는 하늘에 계시다고 기도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구약은 실물교육이자 예표교육이다. 하지만,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교훈, 두 가지가 같이 간다. 그러면서도 진짜 목적은 영적인 교훈에 있다. 열왕기를 얘기할 때 대부분의 설교가 이 왕은 이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것을 아쉬워하는 내용이 반복되는 것 같다. 웃다가 우는 일이 반복된다. 하나님이 여기서 목표로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왕들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의 백성을 치리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도록 통치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매인물에게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왜 예수님이 필요한지를 찾아내야 한다.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일은 인간이 무엇이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꼭 필요한 상황.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왕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언을 성취하셨다. 이일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계속 남기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과 통치과 완전성이 필요하다는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

성경은 왜 그들의 허물을 기록해 놓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알려준다. 남북 왕국이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배역자들이다.그들이 더 잘했어야 했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필요성을 없애는 것이다.

박경서 장로님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로 나누는 것이 잘못된 것 아닌가?

다윗도 잘못한 일이 있다. 다윗이 잘한 일은 메시아 언약을 붙잡고 있었다는 점. 하나님의 은혜를 그에게 심어주셨다는 의미. 나는 이런 것을 바란다. 나는 이런 것을 한다.

다윗이 선한 왕이라고 말하면 복음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비록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해도 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대속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안된다.
누구는 잘했고 누구는 못했다는 식의 해석을 오류이다. 인간은 모두 잘못했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다. 인간의 불의함에서도 하나님이 어떻게 언약을 지켜오셨는가?

김영철 목사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시면 성전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난다. 장소가 우리의 우리의 몸을 통해서 만난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실물로 교육할 때 일시적으로 만드셨다. 언약궤가 사라진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없애셨다. 실물에 주목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천주교에서 언약궤, 성배, 수의 등을 찾는다. 그것을 우상숭배하기 위해서이다. 구약은 실물교육과 영적교육을 함께 하셨다. 중점은 영적이 부분에 있었다. 모세 시대에도 끊임없이 실물은 연약하기 때문에 주신 것일 뿐이다. 의문, 초등학문이다. 만나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배만 채운 사람들에 관해서 안타까워하셨다.

모세는 제사를 지내라고 했지만, 이사야는 반대했다. 실물은 점차 제거된다. 예수님 시대 이후에는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찾아봐도 땅을 사거나 교회를 지었다는 말이 없다. 내가 가정이다. 장소적인 면이 아니다. 사도들의 유지가 곧 변질되었다. 구약 시대에도 모세와 여호수아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변질이 일어났다.

2018년 12월 25일 성탄절 설교

거룩한 낭비

마태복음 01:21~23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현대인의 두려움 – 낭비

성탄절하면 별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 박사에 관한 말씀도 그렇고, 누가복음에서 밤새 양떼를 지킨 목자들도 그렇고 둘다 별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생각하는 말이 있습니다. 칼 세이건이라는 미국의 천체 물리학자가 지구에서 64억 km 떨어진 곳에서 보이저 1호가 찍은 사진을 보고 한 말입니다. 그 사진에는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 하나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창백한 푸른 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한 말 중에 거슬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뭐냐면, “이 우주에서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다“라는 말입니다.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우주에 지구만 있다면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에 낭비에 관해서 설교하려고 마음 먹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칼 세이건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낭비를 싫어합니다. 낭비하지 말자는 말은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동조하는 것 같습니다. 이랜드 사목을 할 때, 이랜드에서 강조한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줄임말로 ‘인, 지, 낭’이었습니다. 인재경영, 지식경영, 낭비제거의 줄임말입니다. 저는 이 세가지 중에서 세번째 낭비제거가 나머지 두가지에 비해서 한단계 격이 낮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인재경영, 지식경영은 거창한 것 같은데, 낭비제거는 좀 쪼잔한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건 제 착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낭비제거를 위해서 매우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작은 낭비에는 신경을 안쓰는 줄 알았습니다. 실상은 기업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조금만 낭비를 제거해도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 뿐만 아니라 개인도 낭비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국가든, 학교든, 가정이든 무언가를 낭비한다는 말을 들으면 분노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낭비하지 말자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낭비의 역설

낭비를 반대하지만, 낭비에 관한 두 가지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낭비하지 않느려고 하면 더 낭비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태안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진 김용균 청년이 있었습니다. 깜깜해서 스마트폰 불빛을 비추고 일하다가 사고가 났는데, 헤드랜턴을 잃어버리고도 하나 더 달라는 말을 못했답니다. 2인 1조로 일했으면 컨테이어 벨트를 비상멈춤 해줄 수 있었는데, 그걸 해 줄 사람이 없었서 숨졌다고 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일부러 악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회사 경영자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용절감 목표를 정해주면, 그 목표 안에서 낭비를 제거합니다. 그러다보면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낄 건 안아끼고 아끼지 않아야 될 건 아끼는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헤드랜턴이나 2인 1조 작업에 드는 비용을 줄이려다가 더 큰 비용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하루만 작업이 멈춰도 헤드랜턴이나 인건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낭비하지 않으려다 더 낭비하게 된 셈입니다.

낭비에 관한 또하나의 역설은 낭비인 줄 알았는데,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하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대부분 에펠탑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에펠탑은 파리 마르스 광장에 있습니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높이 324m로 81층에 해당합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했습니다.

에펠탑을 보지 않으려 골목길로 다녔다는 소설가 모파상은 탑 안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는 그곳이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을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1892년 미국에서 출판된 한 문서(윌리엄 왓슨, <파리 만국 박람회: 토목공학, 공공 토목 공사와 건축>)는 에펠탑이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도시 미관을 위협하고 있’으며 탑을 ‘철판으로 엮인 역겨운 기둥의 검게 얼룩진 역겨운 그림자’라고 폄하했다. 이 문서에는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이 적잖게 서명했는데 그중에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도 끼어 있었다.

백 여년이 지난 지금 낭비의 상징이었던 에펠탑은 파리의 자존심으로 변했고, 매년 수 백만 명이 방문하는 유료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에펠탑 뿐만 아니라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이익이 된 예는 많습니다. 고기집 종업원이 주인이 미워서 망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손님들에게 고기를 막 퍼주었답니다. 그랬더니 망하기는커녕 장사가 더 잘됐답니다.

낭비와 사랑

그래도 낭비 자체가 싫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낭비를 막으려다가 더 큰 낭비가 생길 수 있고, 낭비가 이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눈 앞에서 낭비가 일어나는 건 싫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불확실한 이득을 근거로 낭비를 합리화하지 말라, 낭비는 나쁘고 말합니다.

그런데, 낭비에 관한 특히한 예외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사람들이 낭비하지 말자고 할 때는 한 단어가 빠졌다는 점입니다. 즉, ‘낭비하지 말자’는 말 앞에 ‘나말고’가 숨어있습니다. 남의 낭비에 관해서 죄악시하는 사람들도 자기 낭비에 관해서는 관대합니다. 원가 절감, 낭비 제거를 강조하는 경영자도 양복을 수 백만원 , 시계도 수천 만원, 자동차는 수 억원 짜리를 구입합니다.

그만큼 값어치를 한다고 항변하겠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 낭비가 분명합니다.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낭비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자기는 낭비하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남이 낭비하는 것은 싫지만, 나는 낭비하고 싶는 욕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생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각하는 일들은 대부분 낭비의 결과입니다. 어렸을 때 평상에 누워서 별을 본 일,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은 일, 이른 새벽에 산책한 일, 가족들과 중국 여행 가서 거리를 걸었던 일, 아내와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일, 성탄절에 마트에서 아이들 선물을 샀던 일 등. 아름다운 추억은 모두 비생산적인 일 투성이입니다. 다시 말해서 낭비의 기억입니다.

호스피스 운동을 창시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었답니다. 그런데 예상한 것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중요한 인생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순간들을 말했다.

이를테면 어느 해변에서 저녁 노을을 감상하던 순간,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린 일, 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일, 예정에 없이 1박 2일로 미지의 장소로 짧은 여행을 간 일 등을 꼽았다. 결혼이나 사업 성공, 자녀의 성취, 혹은 유럽 일주 여행 같은 큰 일들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에 새겨진 순수한 기쁨의 순간들을 떠올린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생산적인 일, 혹은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비생산적인 일 다시 말해서 낭비에 가까운 순간을 떠올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낭비한 일을 아름답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기꺼이 낭비한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자기자신에게는 낭비를 허락합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 먹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지출입니다. 담배 피는 사람에게도 담배는 낭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지출입니다. 저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당연한 지출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낭비지만, 스스로는 낭비라고 생각조차 못합니다. 또 사랑하는 연인, 가족, 자녀에게 낭비합니다.

낭비에 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기꺼이 낭비할 수 있는 대상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이다.”라고 말입니다.

거룩한 낭비

하나님은 왜 광대한 우주 공간을 낭비하면서 수 많은 별을만드셨을까요? 그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칼 세이건이 보기에는 그 불합리가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정도 공간 낭비는 기꺼이 감사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스케일이 큽니다. 옛 사람들은 별이 천장에 보석을 매달아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의 스케일이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우주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찬란한 별을 배치해 놓으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보다 더 큰 낭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당은 얼마일까요? 무한대입니다. 현재 인간 중에서 일당이 가장 높은 사람은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입니다. 일당이 무려 2억 5천만원이랍니다. 한 번 축구를 할 때마다 2억 5천만원을 받는 축구선수가 최저임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낭비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일당이 아무리 높아도 무한대에 비하면 0에 수렴합니다. 0에 수렴한다는 말은 0이라는 말입니다. 무한대의 가치를 가진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최고의 낭비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이 만들어진 이래 최고의 낭비가 일어난 날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이 그 지혜를, 그 가치를, 그 능력을 한 인격 안에 제한하셨습니다. 즉, 낭비하셨습니다. 왜 이런 낭비를 감행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처럼 말할 수 없는 무한대의 자원이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구속사에서 구속은 잡아가둔다는 말이 아니라 값을 지불하고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값을 지불해야 할까요? 수억원, 수백 억, 수천 억 아니요, 무한대의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를 비교하면 지구와 우주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왜 하나님의 지혜를 왜 하나님의 능력을 낭비하십니까? 왜 인간을 구원하는데 그렇게 낭비를 하십니까? 하나님의 그 지혜와 능력을 다른 데 쓰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제 자신을 생각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는 낭비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 아내, 제 아이들을 보면, “하나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는 낭비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신자 중에서도 우주와 과학을 생각하면 신앙이 약해지는 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확고하게 들어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저 우주 어딘가에 있는 불확실한 존재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유신론자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직행통로입니다. 신자는 내 안에 계신 성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확고하게 연결된 사람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막연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려고 자기 확신을 가지지 말고,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을 명확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사실 ‘거룩한 낭비’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입니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인데 어쨌든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구절을 택해서 거룩한 낭비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낭비는 바로 오늘 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 이것이 바로 거룩한 낭비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무한한 낭비를 감행하신 성탄절에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낭비가 우리를 살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배도 낭비일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낭비를 알기에 이 자리게 왔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하는 낭비는 낭비가 아니라 고귀한 것입니다. 낭비를 합리화하지는 맙시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치있는 대상을 위해서는 거룩한 낭비를 실천해 봅시다.

2018년 12월 09일 주일 설교

예수님의 탄생이 주는 소망

누가복음 02:01~14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우리나라의 새로운 수저계급론

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은수저 물고 태어났다)이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다양한 의미로 변형되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원래는 ‘부유한 집 태생을 이르는 표현’이었지만, 과거 유럽 귀족층에서 은식기를 사용하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대신 유모가 젖을 은수저로 먹이던 풍습을 빗댄 말이라고 합니다. 은수저보다 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로 금수저, 다이아몬드수저라는 말이 나오더니 매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실을 스스로 비웃는 의미에서 흙수저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훔친수저라는 용어마저 들립니다. 부모가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려서 재산을 모은 경우를 말합니다.

온라인상에 등장한 수저계급론에 따르면 금수저는 자산 20억 이상 또는 연 수입 2억 원 이상인 가구가 속하고 은수저는 자산 10억 원 이상 또는 연 수입 8000만 원 이상 가구, 동수저는 자산 5억 원 이상 또는 연 수입 5500만 원 가구이다.흙수저는 자산 1억 원이다. 흙수저에도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플라스틱 수저라는 새로운 하위 계급으로 분류된다.

수저에 관한 용어가 다양하게 생겨났다는 건 그만큼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고도 성장이 멈추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개인의 노력으로 큰 재산을 모으기 어려워졌습니다.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티끌모아 티끌이다” 신분이 상승할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신분상승 기회였던 사법고시가 폐지되고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부모의 재산과 지위가 대물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한 사회에 관한 두려움이 수저론에 묻어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셨습니까? 자녀에게 어떤 수저를 물려주고 싶으십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어떤 여러분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수저를 선택하셨겠습니까?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자신이 어떤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날지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수저를 선택하셨습니까? 왜 그런 선택을 하셨을까요? 몇 주 있으면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탄생의 과정을 하나하나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 과정은 예수님께서 정성스럽게 우레에게 주는 메세지입니다. 께서 선택한 탄생의 과정을 보면서 수저론에 절망하는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서술한 본문은 예수님과는 정반대 위치에 있는 아구스도 황제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황제니까 다이아몬드 수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호적을 정리하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모가 베들레햄으로 내려가야 했고, 결과적으로 메시아가 베들레햄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즉, 로마 황제는 자기 마음대로 명령을 내렸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는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구스도 황제는 세계사에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라고 불립니다. 로마 제국 최초의 황제라고 나중에 불리지만, 스스로는 황제라고 칭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양아버지인 카이사르가 로마를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로 변화하려고 하다가 암살당했기 때문입니다. 신임하던 부하 부루투스가 암살에 가담하자 “부루투스 너마저도”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넓어지고 그에 따라서 전쟁과 반란, 긴급 사태가 잦아지자 신속하고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는 황제정치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로마 시민의 평등한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황제정치를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두 주장 모두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심각했습니다.

“그런 걸 우리가 알아서 뭐합니까?”라고 질문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네, 맞습니다. 굳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사회 갈등에 대해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아야한다는 점입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마저 죽게 만들 정도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문제가 단 몇 분 동안도 흥미를 끌지 못하는 주제가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를 죽인 부루투스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무엇 때문에 카이사르를 죽였느냐고 원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 입니다. 내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마음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는 카이사르보다 로마 시민들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죽였습니다. 이것이 나의 대답입니다. 로마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카이사르가 살아서 로마인들이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합니까. 카아사르가 죽음으로써 로마 시민들이 자유를 가지는 것을 원하십니까. 나는 카이사르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지혜롭고 용감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존경합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 위에 군림해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죽여야 했습니다. 야심에 대해서는 죽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나의 대답입니다. (하략)” – 부루투스의 연설(카이사르 살해 변명)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념 갈등은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문제가 시대가 지나면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제도 시간이 흐르면 색깔이 바래는 물감처럼 중요성을 잃어갑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해 가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낭만적으로만 그려져서 피부에 와 닿지 않지만,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매우 열등감을 느낄 수 있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열등감을 갖게 됩니다. 어렸을 때 겪은 일일수록 인생에 큰 영향을 줍니다.

방송인 이영자 씨의 연설을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자신은 냄새를 맡는 습관이 있답니다. 먹을 것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이유가 아닙니다. 어렸을 때 집이 생선가게를 했는데, 자기 몸에서 생선냄새가 날까봐 부끄러웠답니다. 다른 아이들이 냄새 맡는 표정을 짓거나 냄새 관련 말만해도 지레 창피함을 느꼈답니다.

예수님은 목동들의 축하를 받으셨습니다. 이 사실도 낭만적으로만 그려지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얕잡아 보일 수 있는 사건입니다. 당시 목동들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선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신분은 매우 낮았고, 반은 도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말구유에 뉘였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말구유에서 난 아이’라고 놀렸다면, 장난으로 말하는 거지만, 당사자인 아이는 매우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요? 말구유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정신에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목동들의 축하를 받으셨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근조 화환 리본에 보낸 사람의 직위와 이름이 써있는 것을 봅니다. 유명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분들이 보낸 화환이 죽 늘어서 있으면 흥성한 집안으로 보입니다. 점포를 오픈했을 때도 비슷합니다. 높은 분들이 보낸 화분이 많으면 인맥이 넓은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누가 조문을 하고, 축하를 했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지위도 간접적으로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낮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셨습니다. 이건 오늘날로 생각하면, 장례식장에 조문 화환이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점포를 오픈했는데 화분을 보낸 사람이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상황을 겪으셔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그런 상황을 스스로 선택해서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선택에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한 것임이 틀림 없습니다.

오늘날 굶어죽을만큼 돈이 없는 집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돈이 없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이 흙수저로 태어났다는 사회적인 낙인을 더 부끄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저만해도 극빈을 경험했기 때문에 지금이면 살만합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흙수저라는 사실, 즉 부자집에서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심한 절망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열등감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열등감 때문에 근심하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열등감을 느낄 수 있는 사실을 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열등감에 고통하는 사람을 위로하셨습니다. 제가 매우 가난하게 자랐고, 고등학교 때 신문배달을 했다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큰 위로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그런 사실이 부끄럽습니다. 고생을 조금도 안 하고 산 사람 얘기를 들으면, 사람들이 부러워하지만, 고생한 사람 얘기를 들으면 위로를 받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소망

예수님의 탄생은 사악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도전장입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최고의 윤리로 알고 살아가는 세상에 던진 하나님의 폭탄입니다. 그 폭탄은 조용하게 폭발했습니다. 하지만,

수저계급론에 좌절하는 건 우리만이 아닙니다. 수 천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앞으로 과학이 발전할 미래에도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이런 종류의 좌절은 계속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탄생이 주는 소망도 여전히 인류 역사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다면, 세상은 더욱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그분이 오시지 않았다면, 세상은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입니다.하나님께 나아갈 방법이 없고, 죄의 대속이 없으며, 용서가 없고, 구세주도 없을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그분께 드린다면, 그분은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일을 하실 것입니다.